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실크로드의 갈림길

둔황

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 허시저우랑 서쪽 끝, 당허강 유역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.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,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, 고대 동서교역, 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.

BC 1세기 초에 한무제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, 양관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, 둔전병과 한인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.

​그 뒤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, 페르시아인, 투르크인, 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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옥문관  서역으로 출발하는 관문

둔황시 서북방면으로 약 1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문관.

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천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는 오아시스 북로의 첫번째 관문으로 이 옥문관을 벗어나면 중국땅을 떠나서 서역으로 나가는 것이자,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이 관문 바깥이 세상밖이라 여겼던 곳이기도 하다.

옥문관은 '옥이 들어오는 문'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, 고대 옥의 산지인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위치한 곳에서 중국의 은, 주 시대부터 옥을 수입해 왔다고 한다. 한무제 때는 이 곳에 '옥문관도위'를 설치하고 흉노를 공략하기 위해서 수차례 출병하였으며,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역시 이 곳을 거쳐 서역으로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.

 

​양쪽으로 만리장성이 연결되어 있었으나, 지금은 성문만 외로이 남아 있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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양관 실크로드 남도를 출발하는 관문

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도 관문으로,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이 인도를 향한 순례의 길에 지나갔던 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.

 

지금 양관에는 성문, 성곽이 남아 있지 않고, 단지 모래 언덕 위에 당시의 봉수대만이 남아 있다.

​양관은 둔황 북쪽의 옥문관과 함께 둔황 이관으로 불렸다. 둔황 남쪽 75km 떨어진 관문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훨씬 볼거리가 많도록 정비되었다. 

​한무제 때에 세워진 방어 요새로 옥문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문호로서, 옥문관을 지나면 북도로, 양관을 지나면 남도로 통하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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월아천 마르지 않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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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, 월아천은 사막의 목마름을 풀어주는 아름다운 곳이다. 약 3,000년 동안 단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.과거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로 이용되었다.

전설에 따르면 둔황은 3만 년 전만 해도 황량한 사막지대가 아닌, 삼림이 우거진 숲이었다고 한다. 그러던 어느 날 둔황이 갑자기 삭막한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 소식을 들은 하늘의 선녀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. 그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현재의 아름다운 월아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.

​그런데, 10여 년 전부터 월아천이 점점 마르고 있어 인근에 조성한 인공호수로부터 물을 받아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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명사산 바람이 불면 우는 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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과거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이 모래산을 건너야 했는데, 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날이면 마치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.

 

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, 예전에 두 나라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도중 갑자기 날아온 모래바람이 불어와 두 군대를 모두 파묻어 버렸다. 결국 명사산의 울음소리는 땅속에 파묻힌 군인들의 유령이 내는 울음소리라는 것이다. 이 울음소리는 악명이 높아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헤매고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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막고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불교 유적 석굴 사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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막고굴은 북조(北朝) 시기부터 원나라 시대에 걸친 세월 동안 만든 동굴 735개로 이루어진다. 전체 석굴은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, 남쪽 구역이 막고굴의 중심이다. 과거 승려들이 종교 활동을 행하던 장소로 동굴 487개가 있는데, 모두 벽화 또는 불상이 있다. 북쪽 구역에는 동굴 248개가 있는데 이 중 단 5개만 벽화나 불상이 있고, 나머지는 모두 승려들이 수행, 거주하거나, 죽은 뒤 매장된 장소이다.

 

 막고굴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 오호십육국 시대 전진 시대인 366년으로 추정된다. 승려 낙준이 이 곳 암벽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, 그 후 법량선사 등이 계속 동굴을 파고 수련하게 되면서 이곳은 막고굴, 즉 '사막의 높은 곳의 굴'이라 불리게 되었다. 

막고굴은 오랜 대자연의 풍파와 역사적 파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현존하는 불교예술의 가장 위대한 보고라는 타이틀을 지키고 있다.

​특히 우리나라 신라의 승려 혜초가 723년부터 727년까지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 나라의 종교, 정치,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인 "왕오천축국전"이 막고굴에서 발견되었다.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발견하여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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